강풀 만화 원작의 26년을 스크린에서 마주 대할 때 왠지 마음 편히 의자에 파묻혀 팝콘과 탄산음료를 곁들여 enjoy할수 없는 불편함을 나만 느꼈을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쉽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아직도 나를 위시해 우리는 그 시대의 연장선상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다른 나라의 비슷한 다른 사건을 영화로 봤다면 이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관람이 되지 않았을까? 영화의 스토리면에서도 오히려 정의로운 영웅이 악의 세력을 응징하는 내용으로만 본다면 박진감 있는 전개에 감탄하며 흥미진진하게 봤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강풀의 원작은 탄탄한 구성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늘 감탄하는 것이지만 강풀의 만화는 플롯이 정말 완벽하다. 그래서 영화화 될 때마다 오히려 새로운 영화적 해석의 여지가 너무 없어 실망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모두에게, 적어도 이 땅을 살아가는 한국인에겐,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그 시대의 한복판에 살았던 광주 출신이라면 그런 일말의 사치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고 같이 분노하고 절망하며 마음을 치며 눈과 마음으로 울부짖을 것 같다.
더욱 좁혀서 그 현장에서 누군가를 잃은 사랑하는 부모, 아내, 남편, 가족을 잃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바로 그 이웃들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주변에서 훌쩍이는 소리들이 들린다. 옆에 앉은 아내도 눈물을 흘리며 보고 있다. 그런데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왜일까?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잘 우는 편인데..
예전에 빌리앨리엇이라는 영화를 보면서는 이유도 모른 채 영화 중반부터 끝까지 계속 울었던 적도 있다. 근래에도 레미제라블 뮤지컬 영화를 볼 땐 판틴의 I dreamed a dream 노래를 들으며 판틴의 불쌍한 처지가 절절히 전해지는 것 같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봤었다.
그런데 절절함을 치자면 절대로 뒤지지 않는 이 영화 앞에선 나는 왜 울지 못할까?
나는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감정의 동기에 대해선 언제나 의심없이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내가 나를 경험해서 아는 것은 '회피'하고자 하는 방어기제에서 나온 반응이 아닐까? 생각된다.
빌리앨리엇의 이야기도 레미제라블의 판틴도 마음껏 불쌍해 하고 연민할 수 있는 것은 그 사건의 현장과 나의 삶과는 전혀 연관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심리적 물리적 관계가 없는 사건에서는 나는 박애주의자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삐뚤어진 세상을 훈계할만한 위치에 설 수 있다.
그런데 영화 26년을 보며 그렇게만 편하게 반응할 수 없는 이유는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범위에 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나게 울고 나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훌훌 털고 재미있었다 ,감동적이었다라며 극장을 나서기엔 너무 찜찜한 것이다. 감정의 표출은 자연스레 스스로에게 어떤 책임을 묻게 된다. '그럼 넌 무엇을 할 것이냐?', '이건 저들이 서로 풀어야 할 과거사지 나랑은 무슨 상관이냐?'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 선택해야 한다. 빌리앨리엇이나 판틴과 같은 급으로 묶어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끊어 버리던지.. 아니면 어떤 일말의 책임의 무게를 함께 지기로 선택하던지..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으로 한참을 올라가는 만여명의 후원자 명단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는... 너는 어떤 책임을 질래?'
물론 영화 제작자들의 바램은 '다만 기억해 달라' 는 것이었던 것 같다.
심리적, 물리적 거리..
스캇펙의 (거짓의 사람들)이란 책을 보면 '집단의 악'이라는 주제가 나온다.
어떤 집단이 고도로 전문화되어질 때 각각의 전문화된 집단이외의 구성원들은 전문가 그룹에게 맡겨져 자행되는 악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쪽으로 <게으름>이 강화되어진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질 수록 각각의 집단은 맡겨진 전문영역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고 또한 맡겨진 자신의 영역에 대해서 전문적이면 전문적일 수록 자신들의 영역이 가치가 있고 오류가 없으리라는 자기 확신에 기초한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쉽다는 내용이다.
사실은 대부분의 전쟁에서 군대의 역할이 이와 같은 현상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상징들, 계급장, 깃발, 훈장, 사열.. 이런 것들은 자신이 속한 군대의 임무가 가치 있으며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이라는 자긍심을 고취시키려 한다.
상명하복은 군대의 기초이자 애국하는 길이며 그 집단안에서 가장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통로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는 두가지 악이 모두 행해진다.
두가지 악은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게으름-직면하지 않기 위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과 <나르시시즘-자신의 결정은 언제나 옳고 무오하다고 정당화하려는 경향>이다.
고도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이들에게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상부의 명령만이 있을뿐이다. 양심적으로 이와 같은 명령에 불복하는 것 또한 그 집단 압력으로 말미암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고취된 집단 무의식은 자신들의 임무는 정당하며 또 정당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그저 무고한 시민인지 아니면 폭도인지 구별하는 것을 포기하고 임무를 수행하려면 그런 광분된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은 그저 '빨갱이'여야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러 진술에 의하면 당시 계엄군의 모습은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지 않는 지난친 폭력성을 보여주었고 무언가의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모습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26년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을 꼽는다면 주저없이 마상렬을 꼽는다.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마상렬은 그 현장의 광기에 휩싸여 무고한 살인과 진압으로 점철된 현장의 복판에 던져진다.
그가 그 악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택한 방법은 극도의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이다. 게으름은 자신의 손으로 행한 모든 악행을 마주하지 않으려 하는 거대한 회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덮어버려지지 않는 악행은 필연적으로 두번재 지독한 나르시시즘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행위의 정당성을 굳건히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의 정당성은 옳아야 하며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묵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하는 절박함이 생겼다. 이 강력한 나르시시즘의 현신이 '그 분'인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분'은 옳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거대한 회피와 정당성은 그 안에서 명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마상렬의 가장 자신을 드러낸 한마디는 그래서 '각하는 정당하다!!!' 아니 '정당해야만 한다!!!'이다.
여기에 또 한 사람, 나르시시즘의 극한를 보여 주는 한 사람은 바로 '그 분'이다.
아마도 추측컨데 '그 분'은 조금도, 정말 조금도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을 지 모른다.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집단의 악은 이렇게 소수의 거대한 나르시시즘으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그런데 또한 이와 같은 악은 다수의 게으름, 즉 직면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절대 다수의 묵인에 의해 덮여지고 잊혀져 또 다른 악의 초석이 되어진다.
미국의 베트남 참전이 모병들로 파병되어질 때에는 이렇다 할 반전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모병들로 충당이 되지 않아 징병으로 바뀌었을 때 미국에서는 비로소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의 자녀들이 베트남 이역만리에 파병 될 때라야 비로소 직면하지 않는 게으름과 미국은 항상 옳다는 나르시시즘으로부터 나와야 했던 것이다.
절대 악으로부터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의 양 갈래로 늘어선 줄 어딘가에 나도 서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이 영화를 보면서 편하게 요즘 유행하는 감정적인 힐링으로만 누릴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개인과 집단, 그리고 거대 집단 이 모두는 필연적으로 게으름과 나르시시즘 이 두가지 악의 조건과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 이 악으로부터 구원 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 악은 끊임없이 악순환되어 이 세상 어딘가에 그에 저항하는 또 다른 정당한 악을 만들어낸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실 우리는 자신, 나아가 내가 암묵적으로 속해 있는 집단의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을 직시할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은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악은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상태를 완전한 객관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 인생의 딜레마이다.
완전한 선은 우리에게 없다. 다만 인류가 가진 역량을 총동원하여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우리를 고발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다시 확인하지만 우리는 절대 선에 닿지 않는 절대 악의 늘어선 줄 어딘가에 서 있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방향이 중요하다.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은 언제나 악을 향하여 있음을 알고 그 잡초를 끊임없이 제하는 선택을 해 나아가느냐? 아니면 가던 길을 계속 갈 것이냐?
오늘 '26년' 영화를 기억하며, 너무나 멀리 간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 번 구원을 생각하게 된다.
나의 불완전한 선택은 최선일 수는 있지만 궁극적인 선은 될 수 없다.
온전하지 않은 양심체계와 지각체계를 가지고 있는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악으로부터의 해방은 사실 나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악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누군가가 외부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야 한다.
p.s. 참고로 필자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크리스천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쉽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아직도 나를 위시해 우리는 그 시대의 연장선상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다른 나라의 비슷한 다른 사건을 영화로 봤다면 이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관람이 되지 않았을까? 영화의 스토리면에서도 오히려 정의로운 영웅이 악의 세력을 응징하는 내용으로만 본다면 박진감 있는 전개에 감탄하며 흥미진진하게 봤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강풀의 원작은 탄탄한 구성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늘 감탄하는 것이지만 강풀의 만화는 플롯이 정말 완벽하다. 그래서 영화화 될 때마다 오히려 새로운 영화적 해석의 여지가 너무 없어 실망할 때도 많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모두에게, 적어도 이 땅을 살아가는 한국인에겐,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그 시대의 한복판에 살았던 광주 출신이라면 그런 일말의 사치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고 같이 분노하고 절망하며 마음을 치며 눈과 마음으로 울부짖을 것 같다.
더욱 좁혀서 그 현장에서 누군가를 잃은 사랑하는 부모, 아내, 남편, 가족을 잃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바로 그 이웃들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주변에서 훌쩍이는 소리들이 들린다. 옆에 앉은 아내도 눈물을 흘리며 보고 있다. 그런데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왜일까?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잘 우는 편인데..
예전에 빌리앨리엇이라는 영화를 보면서는 이유도 모른 채 영화 중반부터 끝까지 계속 울었던 적도 있다. 근래에도 레미제라블 뮤지컬 영화를 볼 땐 판틴의 I dreamed a dream 노래를 들으며 판틴의 불쌍한 처지가 절절히 전해지는 것 같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봤었다.
그런데 절절함을 치자면 절대로 뒤지지 않는 이 영화 앞에선 나는 왜 울지 못할까?
나는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감정의 동기에 대해선 언제나 의심없이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내가 나를 경험해서 아는 것은 '회피'하고자 하는 방어기제에서 나온 반응이 아닐까? 생각된다.
빌리앨리엇의 이야기도 레미제라블의 판틴도 마음껏 불쌍해 하고 연민할 수 있는 것은 그 사건의 현장과 나의 삶과는 전혀 연관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심리적 물리적 관계가 없는 사건에서는 나는 박애주의자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삐뚤어진 세상을 훈계할만한 위치에 설 수 있다.
그런데 영화 26년을 보며 그렇게만 편하게 반응할 수 없는 이유는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범위에 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나게 울고 나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훌훌 털고 재미있었다 ,감동적이었다라며 극장을 나서기엔 너무 찜찜한 것이다. 감정의 표출은 자연스레 스스로에게 어떤 책임을 묻게 된다. '그럼 넌 무엇을 할 것이냐?', '이건 저들이 서로 풀어야 할 과거사지 나랑은 무슨 상관이냐?'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 선택해야 한다. 빌리앨리엇이나 판틴과 같은 급으로 묶어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끊어 버리던지.. 아니면 어떤 일말의 책임의 무게를 함께 지기로 선택하던지..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으로 한참을 올라가는 만여명의 후원자 명단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는... 너는 어떤 책임을 질래?'
물론 영화 제작자들의 바램은 '다만 기억해 달라' 는 것이었던 것 같다.
심리적, 물리적 거리..
스캇펙의 (거짓의 사람들)이란 책을 보면 '집단의 악'이라는 주제가 나온다.
어떤 집단이 고도로 전문화되어질 때 각각의 전문화된 집단이외의 구성원들은 전문가 그룹에게 맡겨져 자행되는 악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쪽으로 <게으름>이 강화되어진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질 수록 각각의 집단은 맡겨진 전문영역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고 또한 맡겨진 자신의 영역에 대해서 전문적이면 전문적일 수록 자신들의 영역이 가치가 있고 오류가 없으리라는 자기 확신에 기초한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쉽다는 내용이다.
사실은 대부분의 전쟁에서 군대의 역할이 이와 같은 현상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상징들, 계급장, 깃발, 훈장, 사열.. 이런 것들은 자신이 속한 군대의 임무가 가치 있으며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이라는 자긍심을 고취시키려 한다.
상명하복은 군대의 기초이자 애국하는 길이며 그 집단안에서 가장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통로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는 두가지 악이 모두 행해진다.
두가지 악은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게으름-직면하지 않기 위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과 <나르시시즘-자신의 결정은 언제나 옳고 무오하다고 정당화하려는 경향>이다.
고도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이들에게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상부의 명령만이 있을뿐이다. 양심적으로 이와 같은 명령에 불복하는 것 또한 그 집단 압력으로 말미암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고취된 집단 무의식은 자신들의 임무는 정당하며 또 정당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그저 무고한 시민인지 아니면 폭도인지 구별하는 것을 포기하고 임무를 수행하려면 그런 광분된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은 그저 '빨갱이'여야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러 진술에 의하면 당시 계엄군의 모습은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지 않는 지난친 폭력성을 보여주었고 무언가의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모습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26년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을 꼽는다면 주저없이 마상렬을 꼽는다.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마상렬은 그 현장의 광기에 휩싸여 무고한 살인과 진압으로 점철된 현장의 복판에 던져진다.
그가 그 악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택한 방법은 극도의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이다. 게으름은 자신의 손으로 행한 모든 악행을 마주하지 않으려 하는 거대한 회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덮어버려지지 않는 악행은 필연적으로 두번재 지독한 나르시시즘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행위의 정당성을 굳건히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의 정당성은 옳아야 하며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묵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하는 절박함이 생겼다. 이 강력한 나르시시즘의 현신이 '그 분'인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분'은 옳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거대한 회피와 정당성은 그 안에서 명맥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마상렬의 가장 자신을 드러낸 한마디는 그래서 '각하는 정당하다!!!' 아니 '정당해야만 한다!!!'이다.
여기에 또 한 사람, 나르시시즘의 극한를 보여 주는 한 사람은 바로 '그 분'이다.
아마도 추측컨데 '그 분'은 조금도, 정말 조금도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을 지 모른다.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집단의 악은 이렇게 소수의 거대한 나르시시즘으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그런데 또한 이와 같은 악은 다수의 게으름, 즉 직면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절대 다수의 묵인에 의해 덮여지고 잊혀져 또 다른 악의 초석이 되어진다.
미국의 베트남 참전이 모병들로 파병되어질 때에는 이렇다 할 반전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모병들로 충당이 되지 않아 징병으로 바뀌었을 때 미국에서는 비로소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의 자녀들이 베트남 이역만리에 파병 될 때라야 비로소 직면하지 않는 게으름과 미국은 항상 옳다는 나르시시즘으로부터 나와야 했던 것이다.
절대 악으로부터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의 양 갈래로 늘어선 줄 어딘가에 나도 서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이 영화를 보면서 편하게 요즘 유행하는 감정적인 힐링으로만 누릴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개인과 집단, 그리고 거대 집단 이 모두는 필연적으로 게으름과 나르시시즘 이 두가지 악의 조건과 치열하게 싸우지 않으면 이 악으로부터 구원 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 악은 끊임없이 악순환되어 이 세상 어딘가에 그에 저항하는 또 다른 정당한 악을 만들어낸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실 우리는 자신, 나아가 내가 암묵적으로 속해 있는 집단의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을 직시할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은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악은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상태를 완전한 객관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 인생의 딜레마이다.
완전한 선은 우리에게 없다. 다만 인류가 가진 역량을 총동원하여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우리를 고발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다시 확인하지만 우리는 절대 선에 닿지 않는 절대 악의 늘어선 줄 어딘가에 서 있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방향이 중요하다.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은 언제나 악을 향하여 있음을 알고 그 잡초를 끊임없이 제하는 선택을 해 나아가느냐? 아니면 가던 길을 계속 갈 것이냐?
오늘 '26년' 영화를 기억하며, 너무나 멀리 간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 번 구원을 생각하게 된다.
나의 불완전한 선택은 최선일 수는 있지만 궁극적인 선은 될 수 없다.
온전하지 않은 양심체계와 지각체계를 가지고 있는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악으로부터의 해방은 사실 나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악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누군가가 외부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야 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_예레미야 17:9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beyond cure. Who can understand it? |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_누가복음 4:18 The Spirit of the Lord is 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each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freedom for the prisoners and recovery of sight for the blind, to release the oppressed, |
p.s. 참고로 필자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크리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