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요나서 4:2)
이 말씀을 보니 이미 니느웨에 가기 전부터 요나는 하나님과 다투었었다. 니느웨에게 회개할 것을 선포해야 할 요나는 하나님과 다투고 다시스로 도망하였다.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침략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민족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나가 볼 때엔 니느웨는 멸망해야 하는 도성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족속에게 이스라엘도 아닌 니느웨에게 선지자로 파송되는 것에 대해 요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면서도 요나는 그 성품 때문에 더더욱 가기를 거절했다.
그런데 삼일길을 걸어야 다 돌 수 있는 큰 성 니느웨를 하루만 슬쩍 돌아 소극적으로 선포했을 뿐인데도 온 니느웨가 회개하며 돌아온 것이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서 4:2)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선지자로 그 땅에 가서 멸망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해 하나님의 성품으로 그 성읍이 구원되리라는 것을 요나는 거절했었고 그리고도 니느웨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는 사실이 싫었다.
그만큼 민족감정이 뿌리내려 있는 요나를 보며 한국이 일본에 대한 태도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억울한 과거를 떠올리면 요나와 같이 반응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 그러한 분위기가 더욱 팽배해졌다.
이 민족의 쓴뿌리와 같은 반일 감정은 과연 치유되어질 수 있을까?
일본이 모든 과거사를 사죄할 때라야 치료되어질 것인가?
적어도 크리스천들에게 이 감정은 어떻게 처리되어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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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ve you any right to be angry?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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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요나에게 물어보신다.
이 땅의 크리스천들에게도 하나님이 질문하신다면 각자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요나서에는 요나의 즉답이 기록되어져 있지 않다. 대꾸를 안했던 것 같다.
아마도 무시하거나 거론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어서일까 그저 성밖으로 나가서 자리를 깔고 앉아 니느웨 성을 내려다 보며 멸망하나 안하나 뚫어져라 지켜보는 고집스런 모습을 보인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서 4:5)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요나서 4:6~9)
아.. 이 부분은 사실 괴롭다.
요나는 나 곧 우리를 보여준다.
결국 나는 자신의 이익에 직결된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빼앗겼을 때에 가장 분노하는 본질상 이기적인 인간인 것을 외면할 수가 없다.
십이만명의 생명보다 내 머리를 뜨거운 동풍으로부터 가려주는 박넝쿨이 더 소중한 것이 사람인 것을..
몇십명이 사망하고 실종되는 비극보다 당장 학교에 안가는 것이 좋아서 태풍이 또 오기를 바라는 포장되지 않은 초등학생의 바램이 어쩌면 실제 나의 모습인 것이다.
내가 일본에 대해서 민족감정을 크게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어쩌면 내 개인의 삶과 직결된 피해감정이 적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잘 공감하지 못하는 약함은 역사의 아픔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것까지 이어져 사실 크게 영향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분노와 감정을 비판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민족감정으로 분노하며 아파하는 사람들을 비판할 수 없으며 하물며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위안부 할머니들과 고통당한 어르신들의 삶의 무게를 지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뭔가를 언급할 자격이 도무지 없다.
다만 내 안에 그리고 누군가 이 땅의 크리스천의 마음에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지기를 기도할 뿐이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서 4:11)
12년전 일본의 크리스천 청년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에겐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나에게 다가와 함께 손잡고 기도하며 회개했었다.
자신들의 조상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다.
곧 다시 일본에 간다.
내가 일본에 가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억 2천만의 인구 중 1%가 안되는 기독교인을 가진 이 나라..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고선 사실 아무것도 내 안엔 없는 듯하다.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무정함으로는 다만 나의 유익인 박넝쿨, 곧 '내 의'만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닌가?
내 머리만 겨우 가리는 내 의를 소멸하시고 아버지의 성품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개 2:6,7>
- 2009년 일본에서의 마지막 공연 중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신과 동시에 무대가 흔들리는 지진을 겪은 후 붙잡게 하신 말씀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1>
-2010년 일본사역을 놓고 붙잡게 하신 말씀
니느웨(지금의 이라크 모술지역)에 남아 있는 요나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Nebi Yunis 회교사원(모스크)
요나는 그 이후 니느웨에 남아서 사역했던 걸까? 원수의 땅에 남아 그들과 함께 일생을 드린 요나의 삶을 상상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