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누가복음 22:39-40)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2:46)
기도하는 이유는 여러가지이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어쩌면 때론 기도에 대해서 자기합리화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아무때고 주님께 얘기하면 그게 기도잖아. 난 언제나 기도하고 있는 걸. '
백 번 맞는 얘기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하셨으니 매 순간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과 교제하는 것,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거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어떤 것이 숨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자기기만 또는 은밀한 유혹이며 시험이다.
자연적인 내 상태로는 언제든지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언제나 사단은 부분을 전체화시키는 수법을 쓰는 전술이 있는 듯하다.
우리가 다 전체의 어느 한 부분을 감각할 수 있으며 그 전체의 한 부분을 통해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전체라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는 유혹의 틈이 생긴다.
왜냐하면 공격적이 되어지고 다름에 대해 경직되면서 방어적이 되어지기 쉽다.
이런 경향은 오랜 시간 어떤 것을 고수해 오던 기성영역에서도 강하게 나타나지만 기성영역에 반기를 들어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서도 더 크게 나타날 때가 있는 것 같다.
반목이 더 심해지면 반목의 주범이 원하는 궁극적인 결과로 치닫는다.
그것은 분리이다. 분리는 주님이 당신의 몸을 찢으시면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가려버린다.
다름을 숨긴 거짓 연합이나 다름을 드러내어 부분으로 통합하려는 시도 둘 다 악하다.
이야기가 많이 벗어났지만 이렇게 나의 뜻은 자기기만으로 말미암아 오염되기 쉬운 영역이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유혹이며 시험이다. 깨어 있지 않으면 어느 새 속아있을 수 있다.
이것을 깨뜨리는 것이 깨어있는 기도이다. 나의 뜻을 내려 놓기로 결정하고 주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선언하며 나의 옛 육신과 싸우는 전장인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삶의 거센 물결을 타고 떠내려가는 중엔 쉽지 않다. 내 생각의 물결, 내 습관의 물결, 내 감정의 물결, 거대한 이 세상의 강요의 물결앞에서 돌아서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 물결에서 벗어나는, 아니 잠시 멈추어 서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에서 부르짖거나 또는 침묵한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선 기도 외에 보이신 길이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의 뜻을 향한 선명한 자유의지를 가지기 위해서 자기기만과 세상의급류와 맞서 서기 위해서라도 나는 기도해야 하며 기도의 시간과 장소를 확보해어 한다.
지금 정말 그렇다.
예수님처럼 인간이신 예수님으로서는 이 잔을 마실 수가 없다.
기도가 아니고서는 그 잔을 마실 힘이 없으셨다.
나도 나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기도한다.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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