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트메이커(Tent-maker)라고 하면 장막짓는자를 지칭합니다.
성경에서 장막짓는자라고 하면 바울과 아굴라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
함께 일하며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세워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의 동역자로 함께 전도여행을 다니기도 하며 자신의 집을 교회로 세우고 아볼로라는 당대의 전도자를 데려다가 도를 자세히 풀어줄 만큼 영향력 있게 세워진 사역자입니다.
바울은 아굴라와 함께 장막짓는일을 하며 동시에 안식일마다 회당에 나아가 유대인들에게 강론하며 권고하였습니다. |
바울에게는 사도로서 사도의 직무에 대한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의 사역을 뒤로 하고 생계에 메달리기 위함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
바울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을 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이 일조차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된다면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내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의 사역은 자비량 사역과 후원에 의한 사역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
이와 같이 바울은 머물러 있는 동안 일을 할 수 있을 때에는 장막을 짓고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을 보내어 주기를 교회에 요청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델을 가지고 어떤 특정한 삶의 형태를 규정 지어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전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내가 자비량 사역자이냐? 전임 사역자이냐?라고 묻기 이전에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자인지를 물어야겟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들리겠지만 사역의 동기는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동기는 깊은 심연에 숨어 있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삶을 자칫하면 사역중심의 삶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라는 말은 다른 말로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의 주권을 완전히 내어드린 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주인으로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 분과 연합하여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본질상 죄인인 내가 죽고 예수님과 함께 의롭게 된 확증으로 죽음에서 부활한 사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게 십자가에 죽고 거듭난 사실이 분명하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그 분께 온전히 드린다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내어 쫓고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선교사,부흥사 즉 사역자들일 것입니다.
이들이 평생을 주의 이름으로 사역을 하고 마지막 때 다시는 기회가 없는 그 날 심판날 주님 앞에서 자신들의 사역을 나열하며 주여 주여 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사역의 결과를 보고 주님이 자신들을 천국에 들여 보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존재를 보십니다. 주님이 보실 때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즉, 거듭나지 못한 죄인이며, 주님이 주인 되시지 않은 모든 일은 불법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곧 아버지의 뜻 안에 들어간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예'가 되는 자입니다. |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난 사실이 어떻게 사실이 되었는지 깊이 들여다 보아 확증이 되신다면 그 복음을 다시 내 삶에 깊이 적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의 일을 쉬고 주님과 연합하여 그 분이 내 삶에 열매 맺으시도록 내어드리는 삶이 무엇인지 물어봅시다.
만일 확증이 안되신다면 그 사실을 시인하는 것부터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 나의 존재적 상태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복음을 들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존재의 물음에 답이 되고 나서라도 사역의 동기는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옛자아의 뿌리에 묻혀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역의 동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주여, 주여)라는 깃발 아래 수많은 것들이 묻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취욕, 인정 받고 싶은 열망, 종교적 열심, 정치적 욕망, 숨겨진 이익, 부패한 내면의 포장된 가면, 진리를 회피하는 도구, 동반의존의 대상, 선한자아의 과시, 관계의 집착.. 아마 무수히 많은 말로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자비량 사역자냐? 전임사역자냐?라는 구분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보다 앞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 라고 물었을 때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의 주권을 완전히 내어드린 자라고 경외함으로 고백하며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의 자비량 사역의 목적도 후원을 요청하는 목적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하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비량 사역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있다면 여전히 그 안에 숨겨진 나의 동기를 물어야 할 것이고 전임사역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있다면 역시 동기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 물음에 명쾌하게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한 싸움입니다.
복음에 장애가 된다는 말은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나와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과 사람과의 생명의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관해 장애가 된다는 것은 두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텐트메이커가 그 업에 매달려 자신의 소명을 잊고 산다면 그것이 복음에 대한 장애일 것이고
자신의 소명을 타인에게 지나치게 주장하여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깨뜨린다면 그것도 복음에 대한 장애일 수 있습니다.
사실 사역도 어느 순간 소명을 향한 갈망이 희석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생업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생업과 사역에서 소명을 향한 갈망이 희석된다면 사역은 취미활동처럼 악세사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텐트메이커의 첫 정체성은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일을 하기도 하며 보냄을 받기도 하는 복음을 전하는 자'
라고 정의하겠습니다.
<2010,6,3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