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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 막 1:17

 

예수님의 목적은 베드로를 사역자로 만들어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존재 자체에 있다고 믿습니다.

<존재가 목적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들어 온 명제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그 존재는 온 세상을 뒤지며 숨박꼭질하듯 찾아 내야 할 것인가요?

 

예수님의 부르신 <이름>이 곧 그 존재라고 믿습니다.

그 이름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상과 같아서 당장은 보여지지 않는 형상이지만 예수님이 부르신 이름이기 때문에 반드시 실상이 될 실상입니다.

당장에 보이지 않는 형상을 찾아 헤매기 보다 더 확실한 길은 그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길의 끝에 이루어진 실상이 있음을 믿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 막 1:18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배대를 품꾼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 막 1:20

 

대부분의 세상의 방향은 되어져야 할 목표(형상)를 설정하고 그 목표(형상)에 합당하도록 자신에게 또는 서로에게 짐을 지우며 살아가도록 몰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 목표(형상)를 향한 부하(짐)는 오늘을 담보로 한 더 나은 내일이라는 수레바퀴에 갇히는 것 같습니다.

내일은 또 다시 그 다음 날의 목표(형상)를 위해 담보로 잡힙니다.

그래서 항~~상 오늘은 수고합니다.

그 형상은 완전함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허상>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마 11:28~30

 

예수님의 길을 가지 않는 모든 길은 (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길인 듯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에서는 내가 그 형상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은 내가 만들어 가는 형상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신 이름(실상)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더 이상 내가 생각하는 형상을 만들고자 오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지우지 맙시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시절을 좇아 절로 열매를 맺듯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되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 십자가는 이미 예수님이 지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연합했다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내가 예수님과 별도로 져야 할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함께 지는 십자가이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고 쉬울 수 있으며 가벼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단코 나 혼자 지면 지지 못합니다.

 

2014년의 반성은 마음이 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건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혼자 고군분투하며 내일일을 염려하는 오늘에 갇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015년 간절한 소망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 안에서 참 쉼을 얻는 것입니다.

단순히 육신의 쉼을 넘어 영혼의 쉼입니다.

송구영신예배 목사님의 말씀처럼 제자로 사는 것, 예수님을 따르기로 매 순간 결정하여 실제로 그 분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항상 주님이 먼저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내게 배우라’라고 하셨으니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2015년 1월 3일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막 1:24 

 

예수님이 사역을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시자 사람들은 세가지에 놀랐습니다.

첫째는 그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는 것과

둘째는 귀신도 그의 말에 복종하는 것, 

그리고 셋째로 병든 자가 나음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단박에 알아보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런데 이들 중에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예수님 곁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새 교훈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과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하고도, 가르침을 듣고도, 심지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도 그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구주로 영접하여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경험과 지식에 머물러 존재를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분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여 따르는 자(함께 동행하는 자)는 예수님과 연합된 거듭난 '존재'입니다.

 

지금 나는 예수님의 교훈을 아는 것에 만족하고, 예수님을 안다는 것에 만족하여 멈추어 버리는 죽은 묵상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새해에 주시는 키워드는 '따르는 자'인 듯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에수님이 하시는 일을 나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가복음부터 시작해 예수님을 따라 그 현장에 서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