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 내가 죽고 내 이웃이 사는 사랑

 

이번 고난 주간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선교사로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귀한 부르심에 감사를 드리지만 크리스천으로서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에 무지한가 자신을 많이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몰랐으면 모를까, 알면 알아갈수록 얼마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녀된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동행하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랑하라는 말씀은 내게는 여전히 심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이 곳 북불은 가정이 다 깨져서 인격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예전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픈지 그렇게 죽는지도 몰랐다. 내게 가장 모순적인 어려움은 '죽음'의 횡포에 휘둘려진 사람들 앞에 주님의 '권위'를 가지고 그 상황을 놓고 믿음의 기도하는 것이었다. 고아로태어나 장애인 남편을 한평생 모시다가 몇년전 사별한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내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너무 큰 이질감과 그 반복성 때문이다.  종교적 성실함으로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나는 몇년안에 포기했다. 피할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 아.. 이것이 나의 한계인가 보다하며 여기까지 이상은 사랑을 못하니 어쩔수 없다고 포기했다. 얼마전 에바라는 20대 자매가 자살을 하려고하여 정신병동에 들어가서 그를 만나러 병원에 자주갔다. 죽음을 토로하는 그 아이 앞에서 나는 내 안에 빛보다 그 아이안에 어둠이 더 큼에 탄식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삶이 다 무너진 사람이다. 6년째 병상에 누워있고, 딸이 셋있는데 아빠가 다 다르고, 담배는 얼마나 피우는지  만날때마다 담배 안피는 나는 머리가 아프다..  말은 늘 죽겠다, 힘들다였다. 에바가 밤 11시에 자살시도한다며 엄마가 전화해서 자기는 어떻게 못하니까 나보고 데리고 가라고 했다. 나는 생각했다. 왜 자살충동이 있는 딸아이가 있는데 술을 집에 사 놓아서 마시고 싶은 충동을 일으켜 이 일을 만드는가? 왜 자기 자신이 망쳐놓은 삶을 나보고 책임지라고 하는가? 왜 나한테 자기도 못지는 짐을 지우는가, 너무 이기적이지 않는가? 나는 언제든지 부르면 가서 피터지는 상황을 보고 나도 충격받아서 어떻게 될수도 있는데, 나는 생각도 안하는가? 그리고 오늘 밤에 우리집에 오면 앞으로 나보고 자기 자식 책임지라는 건가? 이런 여러가지 생각들이 교차하며 나는 그 청을 거절했고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는 병원 응급 센터에 전화했고 에바는 다시 정신병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주에 그 엄마와 함께 딸을 병문안을 갔는데, 엄마는 또 늘 그렇듯 자기 돈 없다, 힘들다, 나보고 택시 운전사 해달라 그랬다. 나는 그녀에게 부탁했다.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를 나는 오래들어주지 못하니, 말을 긍정적으로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무시했다며 화를 내고 사과하는 나를 무시하고 차문을 닫고 떠났다. 그리고 나를 비난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찬데 너는 그렇게 사랑없느냐며 종교적인 칼날을 들이댔다. 그 때 자신의 딸이 자살한다고 했을때 거절한 것을 볼때 알아봤다고 했다. 휴휴... 나는 그녀의 자식들을 담당하다가 보니 시작된 이 관계를 원하지도 않았지만 막상 깨지고 나니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며칠을 주님께 물었다. 도대체 아가페 사랑이 가능하냐고?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알면서 당해주고, 내가 종이 되는것 같은 비천함도 이겨야 하고... 아니 제일 중요한 질문은 막상 이 사랑을 다 하고 나면 그들의 삶을 바뀔수 있느냐고 많은 질문들을 했다. 그리고 그 답을 십자가 앞에서 찾게 되었다. 주님의 자비는,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삶고 함께 눈물흘리신다였고 나의 판단하는 이기적인 사랑은 그 고통을 나누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실체를 보았다. 기도중에 주님께서 피투성이로 십자가를 지시고 내 앞에 계셨다. 나는 그 주위를 뱅뱅돌며 나는 할 수 있을까 하며, 없겠지 하며 계속 뱅뱅돌았다. 내가 못 박아야 하는 것은 내 자아 (이기심)이었다. 이 난제 앞에 요한복음 14장 1절말씀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는 말씀을 세번이나 주셨다. 어리석게도 어디까지 하는 헌신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대단히 잘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주님은 사랑하기 위해 나와 함께 죽자고 하셨다. 그 음성을 너무 크게 들리고 나니 정말 내 속이 고통스럽고 근심이 되었다. 내가 크리스천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치려야 하는 댓가가 '내 목숨'이라는 것이 이처럼 명확하게 들린적이 없었다.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고 처음으로 부활 주일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내 삶을 드리라는 그 초청에 '네'라고 대답했다. 전에는 그 초청에 '네'라고 무지함으로 대답해서 막상 치루어야 하는 댓가를 모르고 내가 막상 죽어야 하는 사랑을 해야 할 때 나는 멀찌감치 서서 주님께서 하세요 하고 팔짱기고 있었다면 이제는 전과 같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 값이 뭔지는 알고 '네'라고 하며 주님따라가기로 했다. 주님, 주님은 왜 죄인을 사랑하셨습니까.... 라는 말만 입밖으로 나오는 몇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선택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기심밖에남지 않은 이 세상에서 '죽음'을 앞에둔 사람들을 살리는 사랑은 내가 죽는 아가페 사랑이 아니면 살릴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길이 '이기심'이라는 우상에서 나를 건지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능력이 있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도 내 자아를 못 박아야 고통의 길이지나고 그 영혼이 살아나고 나도 살아나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랑의 진리가 나를 강권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거대한 사랑의 강물에 몸은 내던진 형태다. 그런데 말씀 보면 죽을 것같아도 막상 그길이 사는 길이라 하셨다.

 

나는 성령의 인도함이 늘 가정에서 시작됨을 깨닫는다. 나는 이 깨달은 진리를 남편에게 적용하고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남편 최병길, 이 사람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위해 내 이기심이 깨어지게 되면 내게 그렇게도 불가능해 보이는 인내하는 아가페의 온유한 사랑이 이루어질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깨달음이 있고 남편과 더 나누었다. 나는 교회 사역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당신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장중요하다고. 왜냐면 남편에게 되면 다른 사람, 나의 이웃, 나의 형제자매에게는 자동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니 그 엄마는 나에게 어둠을 통해 나의 어둠을 보게 하고 빛으로 인도한 천사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 엄마가 내가 보낸 화해의 메세지에 어서 답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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