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일기- 내 신을 벗으라

겨울에서 바로 여름으로 넘어가던 쌩껑땅이 었는데, 올해는 따뜻한 봄날씨가 일주일 넘게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 3개월이란 시간을 보내며 지난 3년동안 끊임없이 계속 되어 왔던 갈등은 바로 '직장'이었다. 직장 일과 달리 교회 일은 풀타임으로 규칙적으로 있는게 아니었다. 한 예를 들면 청년들과 10일의 선교를 떠나면 그것을 위해 정규직, 비정규직일들을 내려놓아야했다.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쌩껑땅은 비가 일주일내내 오기도 할 정도로 습기가 높고 거리를 걷다 보면 대낮에도 술취한 사람들이 지나갈 정도로 실업자와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20살도 안되어 보이는 젊은 미혼모들이 아빠가 다 다른 아이들 하고 가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우면서 지나간다. 건물들은 너무 오래되어 보수는 커녕 벽돌 사이로 잡초가 비집고 나오는 것을 보면 그 건물의 비참함에 내게 감정이 이입되어 나는 이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젊음이 이 곳에서 가는 것이 그저 서글펐다. 시간은 멈춘것 같고 나는 늙지도 않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우릴 보고 뭐하는 사람들인가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프랑스 목사님들은 교회의 후원이 없어 풀타임으로 일을 하시며 목회를 감당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도 가장 가까운 동역자들이 우리를 실업자 대하는 것 같을 때가 아마 제일 견디기 힘들었던것 같다. 또 한가지는 30대 한창인 나이에 바쁘게 지내며 규칙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이러다가 게으름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두려움도 있었다. 프랑스는 '선교사, 목회자' 같은 성직자군은 직업군에도 없다. 어떻게 하면 사회 시스템에 들어가서 프랑스 거주하는 영주권자로 의무를 다할까로 고심했던 시간들이 많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았지만 최병길 선교사와의 결혼과 시작된 프랑스 선교사의 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늘 부끄럽게도 '요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돌아오자 마자 나는 파리와 이 근처에서 나온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했고 괜찮은 조건으로 정규직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 말씀 준비해서 주말에 주일 학교 감당해야지 생각했다. 이제는 더이상 문화 예술 선교를 하는 남편을 쫒아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남편의 언어 능력도 많이 개선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쌩껑땅에서 20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면접을 보러 간 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발생했다. 모든 면접 준비를 완벽히 끝내고 면접을 위해 운전을 해야 해서 운동화를 신고 20분 운전해서 도착한 면접 장소에서 나는 새로산 구두를 깜빡하고 집에 놓고 온 것 때문에 노발대발이었다. 아니 어떻게 문 앞에 준비해놓은 신발을 놓고 올 수가 있지......다행히 30분을 일찍와서 대체할 신발을 살 수 있었지만 내 머리속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내 신을 벗으라' 라는 말씀만 계속 맴맴 돌았다. 면접을 순조롭게 되었고 그 쪽에서는 가능한 빨리 일해주길 바랬다. 1월 3일에 일을 시작해 달라고  했으나 1월 9일부터 19일까지 기도의 집에서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고 그 음성을 들은 나는 모른체 할 수도 불순종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오늘 면접 사건으로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에피소드를 통해 결국 나는 이 '직장'을 또 내려놓았다. 이런일도 있었지만 사실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에바'라는 20대 자매가 자살시도를 해서 정신병동에 있어 방문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교회에서 아무도 자신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 교회는 성탄절 성극으로 바쁘고 연말이어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또각자의 삶이 있어서 그런것이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때 깨달았다. 내가 '직장'을 내려놓고 이 시간을 내지 않으면 나는 절대 이 자매를 방문하고 기도해줄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그 시간이 두세시간일지라도... 그 일이 있은 후 10일간의 기도회에서 주신 주님의 은혜는 앞으로의 갈 방향을 충분히 제시해주셔서 역시 순종이 제일 낫다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또 재밌는 일이 생겼다. 모든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온 날 또 어느 알선 업체에서 좋은 자리가 있다고 전화가 왔을 때 이제 직장을 찾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을 이야기 하는 것은 선교사로서 부끄러울 수 있다. 옥한흠 목사님의 책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을 통해 이것이 '비밀스런 부르심'을 가졌지만 그 부르심에 대해 개인적으로 확신이 생기기까지 걸리는 '탐색' 기간임을 알게 되었다. 나를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 부르심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동반하는 가에 대해  '불안'이 많기도 했고, 세상 관점으로 이제껏 살아온 나에게 모든 가치를 성경적 가치로 엎어버려야 하는 시간을 겪고 있는 것도 깨달았다. 내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온 그 많은 시간들... 그러나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나는 점점 주님의 영광을 보기 시작했다. ' 하나님의 영광'인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제는 세상의 영광으로 인해 갈등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점점 해결되고 있다. 드디어 영광을 향한 질주가 드디어 시작된것 같다. 오래전 아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도 언젠가는 영광의 질주를 할 날이 올거다' 라고. 나는 그 말이 무엇인지 그 때는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씩 알아가는 것같다. 이제는 매일 십자가를 묵상만해도 나는 늘 감사하고, 사랑하기를 선택해서 비록 내가 비천하게 되어도 주님의 못박힌 손으로 만지는 것 같아 또 감동하고 그 사랑에 감사하다.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 손을 뻗어 닿는 것이 이제는 매일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점점 더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진다.  한국에서 파송되던 날부터 다시 두번째로 프랑스로 돌아오는 3년의 시간동안 얼마나 기도했는가, 요나의 정체성을 벗어버리기 위해.... 3일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던 요나, 나는 3년을 고래뱃속같이 답답했던 쌩껑땅에서 보냈다. 그러나 이제는 답답하지 않고 자유롭고 날아갈 것 같다. 주님과의 동행은 하늘을 나는 것만 같고 행복하다. 다행이다. 이런일이 나에게 은혜로 깨달아져서. 이제는 독수리처럼 날고 싶다. 믿음의 눈으로 영광을 보는 것, 한번 뜬 눈을 다시 감을 수 없다. 

 

3년을 돌이켜보니 내가 주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지 못한것이 아닌가 후회스럽고 부끄럽고 주님께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사라는 타이틀도 실업자라는 사람들의 시선도 내게는 아무 의미 없다. 나는 그저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고 나중에 독대할 예수님만 생각할 것이다. "네가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 라는 이 음성이 더 크게 들린다. 내가 다 발가 벗은 상태로 주님 앞에서 '나는 주님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 된다.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주님 맡기신 영혼을 돌보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  숫자는 상관 없고 그 사랑의 질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중심이 늘 그리스도이면 된다. 그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나는 너무 자유하고 기쁘다. 내가 더 나다와지고 더 그리스도 다와지는 것이 좋다. 와우 ~ 요나는 이제 작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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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선교사의 프랑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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