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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5 12:33

위로..Upward? Com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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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어떻게 하면 위로할 수 있나요?
이떻게 하는 것이 위로하는 것인가요?



.....
.....


내 백성을 위로하라. Comfort my people.
이 말씀을 2010년부터 마음 한켠에 두고 있었습니다.
2010년 9월에 일본을 방문할 때 묵상했던 말씀이고 그 해 액츠식구들과 이 말씀을 붙잡고 일본투어를 했었습니다.
그 다음해에 일본대지진을 보며 더욱이 이 말씀이 생각이 났고
마음 속에 궁금증이 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위로할 수 있나요?
이떻게 하는 것이 위로하는 것인가요?

고린도후서 1장을 읽고 묵상할 떄 그 위로에 대한 한 실마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If we are distressed, it is for your comfort and salvation; if we are comforted, it is for your comfort, which produces in you patient endurance of the same sufferings we suffer.
And our hope for you is firm, because we know that just as you share in our sufferings, so also you share in our comfort.
We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brothers, about the hardships we suffered in the province of Asia. We were under great pressure, far beyond our ability to endure, so that we despaired even of life.
Indeed, in our hearts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But this happened that we might not rely on ourselves but on God, who raises the dead.
He has delivered us from such a deadly peril, and he will deliver us. On him we have set our hope that he will continue to deliver us,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권면(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면은 낙천적인 핑크빛 위로가 아닙니다. (다 잘될거야.. 좋은 날이 오겠지.. )
반대로 고난에 참여할 것을 권면하고 있고 자신도 그 고난에 참여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기까지 했다고 겁(?)줍니다.
왜요?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위로가 됩니까?
그 고난으로부터 벗어날 것에 대한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 위로가 아닌가요?

…..(생각…생각…왜요?.. 왜요?)

바울은 자신이 환난당하는 것이 고린도성도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위로받는 것이 있고 위로 또한 고린도성도들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위로는 그 다음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난에 참여할 때 위로에도 참여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한 청년은 이전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 예수님을 따르면 '고난 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선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 주춤하게 된다..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고난'이 없을까요?
굳이 '고난'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더라고 '고통'은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그리 길게 살지 않았지만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이것입니다.

'Life is not good.'

'인생은 선하지 않다.'
즉 고통과 괴로움이 떠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그래도 아직은 이 땅에 어떤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인생에 어떤 선한 소망이 있는지 찾는 분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반갑습니다.
대부분 그런 소망조차 생각하지 않으려 열심히 어딘가로 눈앞에 닥친 시한부성 만족을 위해 달려가고만 있지는 않습니까?


영상출처 http://fallingplates.com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따르던지 그렇지 않고 하나님과 분리된 채 살아가던지 
'고난'과 '고통'은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입니까?
그럼 뭐하러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겁니까?

편의상 고난과 고통을 분리해서 단어를 써 보겠습니다.
'고난'을 예수님을 따라감으로 받는 어려움(또는 괴로움)이라고 하구요
'고통'을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괴로움(또는 어려움)이라고 
편의상 구분지어 보겠습니다.

고난과 고통의 의미가 같을까요?
어려움 또는 괴로움이라는 면에선 같겠지만 
저는 그 끝이 분명 다르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보며 다 이해하지 못하는 의미이지만 생각되어지는 대로 적어보았습니다.

1.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생의 '고통'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향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사회적인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속 200km로 달리던 차의 브레이크를 밟아 선회하기 위해선 차에 부하가 걸립니다. 
세상에 속하여 당연히 그 세상의 물결에 떠다니며 살다가 그 물살에 떠내려가는 것을 멈추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 물살을 거슬러 한 발 한 발 떼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의 물결은 '(죽음에 대한)두려움'이라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낭떠러지(죽음)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이 사실을  감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마취시키는 것이 세상의 문화인 것 같습니다.
   * 여기서 세상의 의미는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입니다.

2. '고난'은 하나님의 치유앞에 직면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염되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사람의 마음'이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입고 있는 옛 자아,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악'(또는 쓴뿌리라고도 하는..)을 비추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료하실 때 
그것을 직면하여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것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고난을 '연단'이라고 합니다. 금을 제련할 때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뜨거운 불속에 넣어 순전한 금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3. '고난'은 잠깐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한 자기 희생입니다.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주로 이런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이 세상은 곧 지나간다는 믿음과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곧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버림으로 보여주신 그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일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광에 참여할 때 영원한 삶이 더욱 영광스러울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면류관(대가)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가 실재일 때 그 사랑이 바울을 움직였을 것입니다.
대가를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바울을 움직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내어 주는 것이 오히려 기쁨이 되고 낭비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미 영원한 사랑과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것을 확증한 한 사람이 기꺼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 사랑을 아직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한 긍휼로 자신의 삶을 내어주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고난'이 아닐까요?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땅에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순겨둔 '고난' 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은 내 세대에선 해석이 안 될수도 있습니다.
몇 세대를 지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역사 가운데에선 알지 못한 채 영원한 하나님 나라 가운데에서 알게 될 '고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지 못하면 이러한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과 투쟁하게도 하고 또 그 투쟁은 역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게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참 신비합니다.
조만간에 이러한 내용을 담은 극 한편을 올리려고 합니다.^^ (개봉박두)



하나님은 이러한 고난 가운데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당신을 나타내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인식하는 한 채널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영원한 삶으로 부르시는 '위로', 하나님의 '위로', 창조주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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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누구나 고통, 또는 고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던 안 믿던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고난과 고통을 만납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위로'에 대해서 눈이 떠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위로'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위로'의 모조품은 수도 없이 많지만 '참 위로'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만 옵니다.

고난을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의 질문에 앞서
'참 위로'를 받기 원하시는지 '위로의 모조품'을 받기를 원하시는 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서는 '참 위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고난과 싸움이 있고 '참 위로'가 있긴 할까라는 끊임없는 의구심을 가지며 겨우 발앞만 비추는 정도를 더듬어 갈지도 모릅니다.

믿음을 구하세요.
'참 위로'를 지나 '참 안식'할 때가 옵니다.

고난과 고통은 선택이 아니지만
어떤 고난과 고통을 받아들일지는 '선택'인 것 같습니다.

바울이 지금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 고난에 참여하라고…


…내 백성을 위로하라…
Comfort my People!!!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
<이사야 40:1>

Life is not good!!
but
God is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