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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5 23:53

열번째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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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이 예수께 와서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 마 19:16-22

 

그는 영생을 얻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생은 선한 일을 해야 얻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가 중요했겠죠. 선한 일에 대한 기준, 또는 목록이 필요했을 겁니다. 

이미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기준이 주어져 있었고 청년은 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굉장히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확인하고 싶었겠죠. 영생을 얻는 일이 정말 이대로 충분한가? 혹여나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부족한 것이 있나?..

 

예수님은 선언을 먼저 하십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의 기준인 율법은 인간이 절대로 도달하지 못하는 기준입니다. 

오히려 율법은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율법을 다 지켜 생명에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 청년에게 예수님은 십계명의 오계명부터 구계명까지를 열거하며 이 모든 계명을 한 마디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요약해 주십니다.

그런데 왜 구 계명까지만 이야기 하시고 열 번째 마지막 계명은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 출 20:12-17

 

어쩌면 예수님은 열 번째 계명의 구조를 ‘하지 말라’에서 ‘하라’라고 바꾸신 것이 아닐까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청년이 ‘하지 말라’라는 계명은 잘 지켰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도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열 번째 계명을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집, 소유를 탐내는 것..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

 

관계가 보입니다.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의존적인 관계로 창조되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사람은 무한한 자원을 가지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모든 것을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사람이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을 떠나 분리되었을 때부터 사람은 유한한 존재가 되었고 그때부터 사람은 결핍, 부족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죽음도 오게 된 것입니다. 자원이 고갈되면 사람은 죽습니다.

 

이때부터 사람은 결핍을 채우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살아갑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터진 웅덩이를 채우기 위하여 수고합니다.

당연히 사람은 열 번째 계명을 어기게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물질만을 탐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떠난 사람은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채우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물질을 탐하여 서로 뺏고 빼앗기를 반복합니다.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육체를 탐합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거.. 이것들은 탐욕의 극단적인 열매가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관계로부터도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를 채워주기를 갈망합니다. 우리가 소위 이야기 하는 사랑의 왜곡된 본질은 누군가가 자기를 채워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사랑받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 받아야만 채워질 것 같은 공간이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기대가 무너지면 사람은 고통스러워 하며 응당 받아야 할 사랑을 주지 못하는 상대를 향하여 분노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받아내기 위하여.. 또는 주지 못하는 상대를 향한 분노 때문에 사람은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거..이와 같은 극단적인 열매를 향하여 움직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사랑의 본질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이 청년이 ‘하지 말라’라는 계명은 간신히 지켜내었는지 모르지만 열 번째 계명을 지키는 것..아니 모든 계명의 본질인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의 형태는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채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빼앗을 수 밖에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결핍과 상실, 죽음으로부터 구원받고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은 다시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가 되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죄인이 죽고 예수,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거듭나는 것 외엔 없습니다.

 

예수님이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청년의 재물은 어쩌면 자신과 같았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재물을 준다는 것은 자기를 주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일부를 주라는 것이 아니라 남김없이 전부를 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하여 살아왔던.. 어쩌면 영생도 그렇게 얻고 싶었는지도.. 

예수님은 청년의 근본을 흔들어 놓으셨고 존재를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내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결핍을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터진 웅덩이에 쉬지 않고 쏟아 부어 수위를 유지했는데 어떻게 다 비워버린단 말입니까?

 

자… 이제 정말 중요한 말씀이 들립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악과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그 터진 웅덩이를 채우는 악을 중단하고 생수의 근원이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본질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근원이 되어 주실 때 비로소 나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후 청년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작은 희망을 본다면 그는 ‘근심’했습니다. 그 ‘근심’이 자신의 존재를 보게 하는 끈이 되어졌기를..

만일 또 깨닫지 못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모든 소유를 다 내어 놓고 자신의 행위를 의지해 '나는 영생을 얻었다'고 생각한 채 주님을 떠났다면 더 큰 일이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고전 13:3

 

정말 간절히 소원하며 기도하는 제목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존재하시고 그 사랑이 나를 움직이지 않으시면 나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육신을 입은 나를 보는 것은 너무 ‘괴롭습니다’

이 괴로움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의 하나님께로’ 나를 인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육신을 입은 나는 아무리 그럴듯하고 좋아 보여도 여전히 ‘율법주의자’입니다. 내가 ‘바리새인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주님.

 

 

 

........

 

2017년 6월 7일 첨언..

 

그런데 글 중 한가지는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은연중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다고.. 사랑하지 않는 책임을 하나님께 떠 넘기는 숨은 의도가 곳곳에서 보입니다.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해 사랑하기로 선택할 때 그 사랑은 흐르기 시작한다고 믿습니다. 로보트처럼 사랑 버튼이 눌러지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살짝 말잔치속에 숨겨진 내가 들켜집니다.ㅠㅠ

 

2013jeju03